본문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주 메뉴 바로가기

다양한 안산문화재단 문화예술 소식을 접해보세요

더 다양한 소식을 원하신다면

예술安

예술 안에서, 누구나 편안하게 이야기하는 공간

명무(名舞) 국수호

  • 작성일2016-09-13
  • 작성자관리자
  • 조회수3467
ASAC한이야기

ASAC한 이야기

50여 년 외길, 명무(名舞) 국수호, 민족의 깊고 깊은 심담(深潭)의 혼을 울리다

>

50여 년 전 17세의 여렸던 소년은 오늘 우리를 대표하는 대가(大家)라는 큰 무게를 짊어진 메신저로 성장해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그의 발 딛음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바라봤고, 그 바라봄을 통해 깊은 내면의 잠재된 의식을 불러일으킨다.

17세 소년, 50년 후의 자신과 마주하다

막힘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식지 않고 타오르는 불꽃처럼. 무던히 한길만을 고집해온 대한민국 무용계의 대가 국수호 선생. 전통과 변화에 대한 실험적 가치의 탐구와 민족의 잠재된 생명력을, 춤이라는 매개체로 일으켜 세우고 영감을 전달하는 이 시대의 춤꾼이자 메신저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 50여 년의 내공을 어찌 그려내고 담아낼지 벌써부터 고심과 맞닥뜨린다. 숨이 찰만큼 조여 왔던 무더위도 그의 50여 년을 어찌 받아낼지 안달 난 나의 머릿속에 비하면 작은 사치에 불과했다. 그렇게 그를 기다린다. 잠시 후 저만치서 인자한 미소의 노신사가 사뿐한 걸음걸이로 와 인사를 건넨다. 다소 부드러운 말솜씨와 감미로운 성량에 안도한다.
그토록 만나보길 고대했던 대가와 마주했다. 그가 먼저 여유로운 자태로 인터뷰에 응할 준비가 되었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한다. 먹고 사는 것이 먼저였던 그 시절, 그것도 남자라는 사회통념상의 성(性)적 규범에 갇혀있던 때, 남자 무용가는 이해의 대상이 되기보단 우려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 그 규범을 깨고 무용가로서 성공을 일궈냈다.

“춤에 인생을 바쳐야겠다고 결심했던 고등학교 재학시절, 스스로에게 이 길에 대한 화두를 던졌고 매진했다. 그 결과 국가의 성장과 함께 나의 꿈도 확산되고 발전했다.”

그렇게 그는 서두름 없이 춤과 마주했던 자신의 소년기를 천천히 짚어낸다.

혼(魂)의 이식

그의 춤사위엔 한국의 맥(脈)이 흐른다. 깊숙이 새겨진 우리의 감정과 DNA를 일으켜 세우 듯 그렇게 말이다. 전북 완주 출신인 그는 두세 살 때부터 이웃 무당의 굿을 보며 자랐고, 농번기 때 울려 퍼지던 농악 가락을 자연스레 접하며 살아왔다. 이러한 성장배경이 오늘의 바탕이 됐다. 이후 소년기 전주서중학교 재학시절 밴드부에 들어 큰북을 맡게 된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서양의 박자와 감성을 접했던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전주농고 1학년 때 토목을 전공하며 땅과 사람 간 관계에 눈을 떴고, 농악대 소리에 심취해 농악기를 접하며 필연처럼 춤과의 인연을 맺게 됐다. 전주 권번(券番)의 춤사범 출신인 정형인 선생을 만난 것도 당시고, 그로부터 삼현승무와 같은 전라도지역의 전통 춤사위를 익히게 된 시기도 그때다. 이어 몇 달 뒤 그의 첫 무대로 기록되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장구춤으로 많은 이들에게 자신을 알리게 된다.
이후 진학을 앞두고 당시 유일의 무용학과를 보유하고 있던 서라벌예술대학으로 진학해 자신의 꿈을 위한 조각들을 다시 맞춰나간다.

“그때부터 제 자신과의 끊임없는 갈등과 화해, 그리고 이상과 성찰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단련시켰죠. 결국 무영가로서 한발 더 내딛게 되는 정점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비상을 위해 섰던 도약대에 올라서기까지 그의 성장기를 담담히 압축한다. 국수호 선생이 춤을 추게 된 계기는 아마도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춤에 뜻을 두고 그것을 위해 인위적으로 출발선에 서지도 않았다. 그저 삶의 일부에 춤이 놓여 있었고 그것들을 외면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살피고 느슨해질 때면 채찍질했다. 그러한 덕으로 오늘 우리가 명무(名舞)를 마주할 수 있는 쾌락을 누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전통무용의 집 지을 때

현재 서울을 비롯한 대한민국 각 지역에 문화예술 관련 기관과 단체, 그리고 공간들이 수없이 존재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의 것인 전통예술을 마음껏 풀어놓을 그릇은 없다. 이에 국수호 선생은 “서양복식을 입고 전통춤을 추는 것과 같다.”며 우리 것을 대하는 우리 스스로의 현 상황을 꼬집는다. 또 “서양식 무대는 많다. 심지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연장들도 그렇다. 판소리만 해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데 전용극장조차 찾아볼 수 없다. 우리를 위해서라 지금이라도 진중하게 고민해야 한다.”며 스스로의 각성을 요구한다.
사실 그가 서온 무대들도 다르진 않았다. 이는 명인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가 문제일 수도 있다. 그들은 우리 스스로가 보호하고 지켜내야 하는 우리 자신임에도 한참을 내려놓고 여전히 다른 시선으로 외면한다. 우리 정신의 버팀목은 오랜 DNA로 이어져온 ‘혼’이다. 그것은 지켜져야 함이 마땅하다. 이에 국수호 선생은 “우리 정신의 버팀목은 바로 전통적으로 이어온 가(歌), 무(舞), 악(樂)에 있습니다. 집도 없이 공연한다는 것은 절도 없는 빈터에서 공염불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50년 이상 춤을 추며 늘 그 공간이 절실했고, 앞으로 지켜가기 위해서도 공간이 절실한 것이 현실입니다.”

실제로 국립극장을 비롯한 예술은 전당은 물론 심지어 국립국악원까지 우리의 것이 아닌 서양의 공연을 염두에 둔 공연장들 일색이다. 국수호 선생도 이에 동감하며 순수한 우리만의 ‘예술 공간’을, 그리고 그것들이 ‘잉태될 집’을 고민했다. 실제로 주변국인 일본의 경우도 가부키(歌舞伎) 공연장 등과 같은 전통 공연장을 도심 내에서는 물론 지역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중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베이징과 상하이와 같은 대도시는 물론이고 지방 도시들에도 경극(京劇)을 위한 전통 공연장이 존재한다. 바로 그들의 ‘혼’인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는 우리의 것을 담을 그 집이 없다. 그로인해 사람들에게 쉽게 잊힐 수밖에 없는 촌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우리 몸이 기억하고 있는 영혼의 양식이 말이다.

앞으로 가야할 50년의 길

그는 지금 내일을 꿈꾸고 있다. 더 많은 연구와 더 깊은 춤의 세계로 가라고 열정이 이끌기 때문이고, 지나온 동안 스스로에게 던졌던 화두들 때문이다. 어렸을 적부터 우리네 흥을 몸에 익혔고, 서라벌예술대학 졸업 후 중앙대에서 연극영화와 동대학원에서 민속학을 전공했다. 1973년 국립무용단에 입단했고 30여 편의 작품에서 주역을 도맡았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정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1980년대에 들어서는 안무가로 명성을 쌓았고, 결국 88서울올림픽 개막식의 안무를 전담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당시의 감격은 여전히 메아리쳐 남아있다. 2002년 월드컵 개막식에도 공연 안무를 맡았고 국립무용단 단장을 비롯해 서울예술대와 중앙대 교수 역임 등 후학 양성과 우리의 전통을 알리는 데 기여하며, 쉼 없이 자신을 깎고 또 깎아 오늘을 완성했다.
명창(名唱) 안숙선 선생과도 인연이 깊다.

“국립극장 시절 안숙선, 양성옥 선생과 함께 경쟁하듯 연습에 몰두했었습니다. 남들보다 몇 시간 먼저 나와 연습하고, 더 늦게 들어가 ‘귀신’이란 별칭까지 얻었을 정도였죠.”

오늘날 이들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예술의 든든한 산맥으로 자리하고 있다. ‘오늘의 전통은 내일의 전통이 된다.’ 국수호 선생의 말이다. 오늘을 소중히 지켜내야 내일이 밝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연구하며 책 속에 파묻혀 산다. 다양한 고증들을 풀어내 내일을 잇기 위함이다. 지난 50년 수많은 스승들의 춤을 한 몸으로 받아낸 그가 자신의 몸을 풀어내 내일을 지어 내려는 듯 그렇게 말이다. 그래서 그가 빚어낼 경지의 춤이 기대된다.

Mini Interview

안산문화재단 : 요즘 후배들은 활동하기 비교적 좋은 환경이다. 선생님 시절 땐 어땠나?
국수호 : 지금에 비하면 분명 어려웠다. 꿈이라는 것조차 가지기 어려운 때였다. 사회적 인식도 그랬고 경제도 그랬다. 꿈을 이루기 위한 숭고한 생각 없인 매우 어려웠다.

안산문화재단 : 우리 전통무용이 갈 길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이 궁금하다.
국수호 : 전통무용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물론 다양성이란 이름 아래 대중들 속에서 말이다. 하지만 전통무용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고수라는 단어처럼 마음으로 존경받고 뿌리로서 부모와 같은 예술분야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안산문화재단 : 전통과 현대의 교류 또는 각자의 색을 찾아 가는 것 중 현명한 선택은?
국수호 : 나의 작업에서도 현대의 것들과 교류된 것들이 많다. 코리안 드럼과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녹슬지 않고 더 윤택하고 올바른 전통다운 전통을 만드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나의 북춤과 그 영향으로 태어난 난타의 만남이 그렇다. 생각만으로도 멋지지 않나?

안산문화재단 : 요즘 세대들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이 궁금하다.
국수호 : 요즘 사람들 얘기하기 전 전공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요즘 사람들의 보는 시각적 수준이 상당하다. 따라서 전공자들이 진정성 담아 책임 있는 문화예술 콘텐츠를 대해주길 바란다.

안산문화재단 : 북춤에도 지역적 특징이 있는가?
국수호 : 북춤을 이해하기 전 북소리에 귀 기울여보면 그 특징이 함께 이해가능하다. 크게 보면 우리민족의 맥박을 그대로 닮은 북이지만, 지역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충청도의 경우 차분하면서도 여유롭고, 전라도의 북소리는 멋스럽다. 또 경사도지역의 북소리는 남성적이고 담백하다. 이러한 소리의 멋이 북춤에도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안산문화재단 : 춤 예술의 특징과 매력은 어떤 것이 있나?
국수호 : 여흥으로 보이거나 보여주기 위해 만든 춤이 따로 있다. 하지만 결국 우리 몸속과 핏줄을 타고 흐르는 DNA에 담겨져 있는 것이 춤이다. 다시 말해 누구나 영위가 가능하고 시대나 나이에 따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매력이 가득한 예술로, 새로움을 찾을 수도 있고 과거로 회귀할 수도 있는 유연한 특징이 있다.

안산문화재단 : 올해 한성준 예술상을 받으셨다. 부담감도 크겠다.
국수호 : 한국 춤의 아버지인 한성준 선생님의 뜻을 거듭 기릴 수 있었고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 감사하다. 이에 과거를 저의 몸과 정신에 담아낸 뒤 재창작 작업을 통해 미래의 전통을 만들 수 있는 비전을 제공하고 창조자가 되고 싶고 당연히 부담이 큰 것도 사실이다.

안산문화재단 : 안산에서는 언제쯤 뵐 수 있는지?
국수호 : 30여 년 간 디딤무용단을 유지해온 원동력이었고, 우리나라 해외로 나간 문화수출품 1호였던 코리안 드럼으로 오는 10월에 뵙게 된다. 매우 기대된다.

ASAC한이야기

안산 시승격 30주년 기념 BIG 3

2016 국수호디딤무용단 <코리안드럼 영고迎鼓>

  • 일시 : 2016-10-15(토) 5PM
  • 장소 : 해돋이극장
  • 런타임 : 80분
  • 관람연령 : 8세 이상 관람가
  • 관람료 : R석 3만원, S석 2만원
  • 문의 : 080-481-4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