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잘하는 앵무새, 춤 잘 추는 학 두루미, 문채 좋은 공작 / 공기적다 공기 뚜루루루루룩 숙궁 접동 스르라니 호반새 날아든다 / 기러기 훨훨 방울새 떨렁 다 날아들고 / 제비만 다 어디로 달아나노.”
2003년 10월, 경서도 소리공연대회. 경기잡가 중 제비가가 신명나게 끝났을 때 심사위원석은 술렁였다. 소리판에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청년이 소화하기 어려운 고음부와 비약적인 가락이 풍부한 이 노래를 제 노래인 양 갖고 노는 모양새가 일품이었다. 소리를 시작한 지 5개월 되었다니 놀람을 넘어 당황스러움이 심사위원석을 감쌌다. 1등 상을 주기 충분한 실력이었으나 2등상인 은상을 준 것은 이 소리꾼이 재간만 많아 반짝 떴다가 질 별 인지, 뼛속까지 풍류가 흘러 생이 다하는 순간에도 세상에 경기소리의 기운을 더할 소리꾼인지 지켜보겠다는 뜻이 담긴 듯했다.
소리 입문 5개월만의 수상이라는 초유의 사건, 그 주인공은 당시 28세의 청년 이희문이었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지금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12잡가 이수자로 경기소리 인생을 올곧게 그러나 퍽 ‘잡스럽게’ 걸어가고 있다.
경기잡가, 잡(雜)스러움을 살리다
경기민요와 함께 경기소리를 이루는 경기12잡가는 유산가, 적벽가, 제비가, 집장가, 소춘향가, 형장가, 평양가, 선유가, 십장가, 출인가, 방물가, 달거리의 12곡을 가리킨다. 여기서 잡가란 단순히 뭔가가 뒤섞였다는 뜻이 아니라 다종다양한 노래를 아울러 만든 독특한 장르라는 의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잡가는 18, 19세기 서민문화와 양반문화의 경계가 모호하고 사회 · 경제적으로 계층 간의 이동이 일어나던 변화의 시기에 태동했다. 절제된 양반 중심의 문화에서 서민문화가 대두되면서 인간의 희노애락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노랫말, 곡, 가창법 등이 모두 한데 어우러졌다. 예컨대 경기12잡가 중 ‘제비가’의 경우 판소리 춘향가의 ‘사랑가’와 흥보가의 ‘제비후리는 대목’, 민요 ‘새타령’ 등이 과감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처럼 다양한 노래를 소화해야 하므로 경기잡가의 소리꾼은 각각의 장르를 아우르고 고음과 저음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14분정도의 긴 시간동안 온전히 몰입하여 감정의 정수를 뽑아내야 한다.
이희문은 경기잡가의 이러한 ‘잡(雜)스러움’에 빠진 소리꾼이다. 하여 그는 전통소리꾼뿐만 아니라 현대무용가, 현대음악가 등 장르를 넘나드는 전방위 예술가들과 함께 폭넓은 장르가 융합된 21세기의 연희를 펼치고 있다. 오늘날 퓨전 음악공연에서 우리의 소리가 현대음악에 맛을 더하는 조연정도로 자리매김하는 데 비해 그의 공연에서는 경기잡가가 탄탄한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오늘날의 정서가 녹아든 재기발랄한 연희를 펼친다. 2008년 그의 이름을 딴 소리 연주회 ‘희문(熙文)’을 처녀작으로 선보인 이래 해마다 경기소리 신작 공연을 올리고 있다. 소리프로젝트 ‘거침없이 얼씨구’는 ’집에서 밥하다 나온 어머니들과 함께 무대를 만든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라는 엉뚱한 호기심에서 만들어졌고, ‘황제, 희문을 듣다’는 고종황제시절에 가무별감을 지냈던 경기명창 박춘재를 모티브로 하여 민속악이었던 경기잡가가 궁중에서 연주되기 위해 음악적으로 변화를 보였던 사실을 소재로 해서 그만의 스타일로 변화시킨 것이다.
오는 10월에는 안산문화예술의전당 별무리극장에서 경기잡가가 자아내는 다채로운 풍경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잡을 선보일 예정이다. 뒤이어 12월에 신작을 선보인다니 그 창작 에너지가 뜨겁다.
“초등학생 때는 가수 민해경의 팬이었어요. ‘그대 모습은 장미’에 열광했죠. 노래도 멋지지만 가수의 스타일에 푹 빠졌어요. 가수의 꿈을 키우다가 일본에 가서 영상을 공부했어요. 귀국해서 뮤직비디오 조감독을 했습니다. 감독으로 입봉을 앞두곤 소리꾼으로 방향을 전환했고요. 경기잡가와는 전혀 관련 없는 길을 걸어온 듯하지만 이제 생각해보면 잡가를 하기엔 더없이 좋은 ‘잡스러운’ 삶을 맛본 것 같아요. 경계 또는 한계를 두지 않는 경기잡가의 열림! 그것이 바로 잡스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슬프되 슬픔에 함몰되지 않고, 즐겁되 도를 넘지 않는 경기잡가의 위트있고 재기발랄한 음악적 지향이랄까 철학도 제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입니다.”
이희문은 소리꾼이면서 서울예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스승이며 공연집단 이희문컴퍼니를 이끄는 리더이다. 20대 여성소리꾼 그룹 ‘앵비’, 평범한 어머니들로 구성된 ‘숙씨스터즈’, 20대 꽃미남그룹 ‘놈놈’ 등 다양한 프로젝트그룹의 기획자이자 연출자로서 경기소리의 현대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다양한 삶의 결을 만들 수 있는 저력도 그가 지향하는 ‘잡스러움’과 ‘재기발랄’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세 어머니, 세 빛의 사랑
소리꾼 이희문은 세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낳아주신 어머니 고주랑 명창은 그에게 ‘모태소리’를 심어주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아들에게 소리꾼을 제안하신 적이 없었다. 외롭고 힘든 예인의 길에 핏줄을 세우지 못한 모정이었다. 그가 어릴 적부터 이모처럼 따르던 이춘희 명창은 그가 소리꾼 재목임을 알아봐준 어머니였다. 그가 경기소리를 흥얼거리는 것을 듣고 단박에 알아본 이 명창은 “희문아, 소리 해보지 않을래?”하고 제안했고 그가 얼마간 연습해서 그의 앞에서 긴아리랑을 부르자 “넌, 꼭 소리해야겠다!”고 확신을 담아 얘기했다. 이희문 씨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그의 세 번째 어머니는 현대무용가 안은미이다.
“경기소리를 시작한지 3, 4년쯤 지나서 안은미 선생님을 만났어요. 소리꾼은 소리무대에서 소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판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신 어머니죠. 소리의 길을 가면서 제게 이런저런 고민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그 고민을 단칼에 해결해주셨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하면 ‘세상에는 안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경기소리와 현대의 춤이 그토록 멋지게 어우러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어요. 고민 많은 무대도 선생님의 손길이 닿으면 세련미의 극치를 자아냅니다.”
함께 걷는 아름다운 길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할 줄 아는 어른이 된다고 했다. 자그마치 세 어머니의 특별한 사랑을 듬뿍 받아서일까. 소리꾼 이희문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정이 많다. 특히 그는 서로 전혀 다른 에너지를 지닌 장영규, 이태원 감독과의 인연을 얘기하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국악을 전공하신 이태원 선생님은 강한 이론을 토대로 즉흥적인 곡을 만드는 데 탁월하시죠. 베이스기타 연주자이시기도 한 장영규 선생님은 이국적인 유러피안의 감수성이 풍부하십니다. 좌우의 날개로 나는 새처럼 개성이 강한 두 선생님께 배우면서 색다른 노래의 날개 두 개를 얻는 느낌입니다. 그 노래의 날개 위에서 참 행복합니다! 또, 저와 함께 하는 공연팀과 굳이 말하지 않아도 호흡이 맞을 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빨리 가려면 홀로 전력질주를 하면 된다. 그러면 그 길가에 핀 꽃이며 새들의 노랫소리를 놓치게 된다. 인생은 남들을 제치는 속도전이 아니다. 홀로가 아닌 함께, 달리는 것이 아니라 춤추듯 즐겁게 가는 것이 행복한 인생길이다. “같은 팀은 물론 관객과 하나 되고 ‘잡스럽게 잘 헌다!’ 소리를 듣는 예인이 되려면 연습이 부족하면 안 되죠!”라며 다음 공연 준비를 위해 공연장으로 향하는 소리꾼. 그의 걸음걸이가 산들바람에 춤추는 나비 같았다.
잡[雜] ;
여러 가지 소리가 마구 뒤섞인, 천박한, 막된의 뜻을 더한 접두사
조선후기, 서울에서 잡스럽게 만들어진 소리가 있었으니…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노래하던 유행가 <잡가> 기성복을 벗어 던지다!
여러 가지가 마구 뒤섞인, 천박하다는 뜻의 ‘잡雜’. 소리꾼 이희문이 옛 노래인 ‘잡가’로 그의 소리친구들과 잡스러운 쇼를 벌인다. 12잡가에 담긴 인생의 희노애락을 노래하며 가에 담긴 이상야릇한 매력과 진정한 의미를 관객과 나누고자 한다.
지상 최대의 잡꾼들이 선사하는 노래의 향연,
쇼 안에서 모두가 잡스럽게 존재하시길!
이희문 컴퍼니는 소리꾼 이희문을 주축으로 장르를 넘나드는 전방위 예술가들이 모인 집단이다. 이희문은 변방에 놓인 시조, 가곡, 가사, 잡가, 경서도 민요 등 다양한 전통 성악을 공연의 중심으로 끌어와 성질이 다른 장르들과 접합한다. 그렇게 창조한 무대 위에서 관객에게 옛 노래를 듣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