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다르다. 한 사람은 희곡을 쓰는 작가이고 또 한 사람은 연출가이다. 작가인 그는 불처럼 뜨겁고 직설적이며, 연출가인 그는 물처럼 흐르며 에둘러서 말한다. 온전히 홀로 몰입해야 하기에 필연적으로 고독한 작가와, 판 전체를 조망하며 조화를 모색하는 연출가가 서로를 자연스럽게 ‘이 친구는!’이라고 얘기할 때 깊은 신뢰가 느껴졌다. 극단 달나라동백꽃의 공동대표인 김은성 작가(37)와 부새롬 연출가(38). 서로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신뢰의 뿌리가 무엇인지 발견하는 기쁨은 더위에도 한기를 느끼는 시대에 따뜻함으로 다가왔다. 급한 마음에 함께 일하는 이유부터 물었다. 친구를 옆에 두고 친구 얘기를 하는 민망함을 먼저 극복한 이는 김은성 작가였다.
“새롬이는 피가 깨끗해요. 연출에서나 삶에서나 ‘흔들림 없는 기준’이 있는 친구죠. 기분파인 저와는 다릅니다. 희곡 한 줄 한 줄이 얼마나 뼈아픈 줄 아는 연출이기도 하죠.”
친구라면 마땅히 쓴 소리를 할 수 있을 터, 아쉬운 점은 무엇인지 물었다.
“연출에 욕심 부려도 될 듯해요. 조금 더 뜨거운 연출! 새롬 아닌 연극인들에게 하는 제언이기도 하죠. 연극의 토양은 변함없이 척박해서 연극인은 가난해요. 때문에 어느 순간 서로에 대한 위로가 정체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조용히 귀 기울이고 있던 부새롬 연출가가 자못 신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다른 작가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그들의 대본을 보면서는 잘 감동하지 못했는데 은성이의 대본을 읽으면서 감동이란 걸 했어요. 이 친구의 대본을 읽다보면 새삼 ‘은성이가 잘 쓰는 작가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연출가는 작가에게 아쉬운 점을 얘기하지 않았다. 이 역시 두 사람의 ‘다른’ 지점이다.
달나라 동백꽃과 로풍찬 유랑극장의 꿈
김은성 작가는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10살 때까지 그곳에서 살다가 상경했다. 부새롬 작가는 부산이 고향이고 21살 때 대학입학과 함께 서울로 왔다. 2008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함께 연극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두 사람은 2011년 8월 8일 뜻을 같이 하는 연극인들과 함께 젊은 극단 ‘달나라동백꽃’을 창단했다. 이 극단은 배우, 연출가, 작가, 무대디자이너 등 11명의 단원이 자기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서로의 영역을 넘나드는 공동창작을 지향한다.
함민복 시인이 노래한 서로의 ‘경계에 꽃 피우는’ 작업을 꿈꾸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극단이름에도 꽃이 핀다. 이 세상처럼 텅 빈 황량한 무대인 달나라에 활짝 피었다가 목아지째 떨어지는 동백꽃이다. 그 꽃은 순간에 피어났다가 사라지는 연극, 그리고 인간의 삶을 닮아있다.
창단 이후 달나라동백꽃에서는 김은성 작, 부새롬 연출로 ‘달나라연속극’, ‘로풍찬 유랑극장’, ’뻘‘ 등의 작품을 선보였는데 특유의 생명력이 펄떡이는 한국적 정서와 명징한 아우라로 평단과 관객의 호응을 받았다. '달나라연속극'의 옥탑방 일가를 비롯해서 한국전쟁 직전 보성에 흘러들어온 유랑극단, 5월 광주의 상흔이 새겨진 1981년 벌교의 사람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지극히 한국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들 작품의 모티브가 외국의 명작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이들 세 편의 작품은 김은성 작가가 각각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 류보미르 시모비치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 체호프의 '갈매기'를 모티브로 재창작한 것인데 우리의 현실과 역사에 데칼코마니처럼 맞물린다.
오는 10월, 안산문화예술의전당과 대학로예술극장에서 ‘로풍찬 유랑극장’의 막이 오른다. 1985년 초연한 세르비아 시인이자 극작가 류보미르 시모비치의 ‘유랑극단 쇼팔로비치’를 원안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원안의 배경인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군에 점령당한 세르비아의 한 마을은 1948년 여순반란사건 이후 좌우 대립이 극심한 전남 보성의 새재마을로 바뀌었다.
한국전쟁 발발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 빨치산과 토벌대의 살육전이 끝없이 벌어지던 세재마을에 아코디언 소리와 북장단이 흥겨운 가운데 로풍찬 유랑극장이 흘러들어온다. 흉흉한 시절에 마을을 찾아온 극단은 판을 펼치기도 전에 신원이 확실치 않다는 이유로 순경에게 고문을 당하는가하면 죽창을 들고 덤비는 살기등등한 우익청년단원 피창갑을 맞닥뜨린다. 주민들은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 취급당하는 시기에 한가하게 연극타령이냐며 이들을 냉대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극단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번안한 ‘노민호와 주인애’의 막을 올린다. 철없어 보이는 극단의 행동은 뜻밖의 파문을 일으킨다. 참혹한 전쟁 속에도 연극은 칼보다 강하다고 믿는 예술가들의 모습이 감동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야만의 시대에 더 큰 야만의 시대가 펼쳐지는 그런 상황 속에서 꿈꾼다는 것, 그것이 연극이라는 메시지를 남기는 작품입니다. ‘꿈꾸는 작은 힘’을 일깨우지요.”
김은성 작가는 담담하면서도 결기어린 음성으로 작품을 이야기 했다.
로풍찬과 하가림, 김은성과 부새롬
극단 달나라동백꽃의 순결한 자기고백 같은 작품 ‘로풍찬 유랑극장’에서 애착이 가는 인물을 묻자 김은성 작가는 ‘로풍찬’을, 부새롬 연출은 ‘하가림’을 꼽았다.
“로풍찬은 극단을 이끄는 사람이지만 대사도 별로 없어요. 그런 그가 극의 방향을 끌고 갑니다. 그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저를 그에게 투영시켰기 때문입니다. 연극에 대한 자세랄까 가치 같은 것을 그를 통해 이야기 하고 싶었어요.”
“저는 하가림에 애착이 가요. 그는 참 답답한 캐릭터입니다. 여러 모로 관객들이 쉽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고, 존재감도 없죠. 그런 그가 제 가슴에는 깊게 자리하고 있어요.”
로풍찬과 하가림은 다른 캐릭터이지만 인간적인 연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에서 교집합이 별빛처럼 빛난다. 직설의 쾌남 김은성 작가와 위안의 누님 같은 부새롬 연출이 연극이라는 같은 꿈을 꾸듯이. ‘로풍찬 유랑극장’의 가을 개막을 기다리는 관객들에게 작품을 소개해달라고 요청했다. 김은성 작가가 “관객들에게 연극을 왜 봐야 하는지 얘기해 주는 작품입니다.”라고 이야기하자 부새롬 연출은 “우리 연극인들이 왜 연극을 하는지 얘기해주는 작품이죠. 무엇보다 지칠 때 힘을 주는 작품입니다!”라고 말했다.
광기의 시대에 사람다움 일깨우는 예술의 힘 - 동아일보
전쟁의 피비린내 속에서 찾는 연극과 삶 - 연합뉴스
나란히 걷는 친구
7년쯤 알고 지낸 두 사람이지만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선 잘 알고 있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듯 보였다. 김은성 작가는 얼마 전에 부 연출의 생일잔치가 있었다는 것도, 회식이 있었다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부 연출은 그런 김 작가를 이해하는 듯했다. 문득 김은성 작가가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새롬이가 전화를 해줄 때가 있어요!”라고 말했다. 지향이 같은데 무슨 상관이랴. 서로의 생활에 대한 관심이나 각자 다른 삶의 취향 따윈 같은 지향의 금강석 앞에선 힘을 잃는 것이리라.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믿는 구석, 힘을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 두 친구가 우정을 이어가는 방식인 듯했다. 문득, 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돼서도 그들만의 ‘우정 시너지’를 발휘한다면 세상이 좀 더 살만해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황급히 내 주위를 점검해보았다. 인생에서 같은 지향을 가진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카뮈가 말한 친구의 조건이 새삼 귓전에 울렸다.
내 앞에서 걸어가지 마라. 나는 뒤따르지 않을 테니.
내 뒤를 따라오지 마라. 나는 이끌지 않을 테니.
내 옆을 걸으면서 나의 친구가 되어다오. - 알베르 카뮈